환갑 넘긴 조선 임금 5명의 장수 비결

 -태조ㆍ정종ㆍ숙종ㆍ영조ㆍ고종만 환갑 이후까지 살아

 -격구를 즐긴 정종 외에 대부분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

 조선의 임금 중 환갑을 넘긴 사람은 태조(사망 시 나이 74세)ㆍ정종(63세)ㆍ숙종(60세)ㆍ영조(83세)ㆍ고종(67세) 등 모두 5명이다. 광해군(67세)까지 포함하면 6명이다. 이들에겐 특별한 장수 비결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으로보다는 전쟁터의 장수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전투와 훈련이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운동이 됐을 것이다. 그는 58세에 왕위에 오른 뒤부터 병치레를 한다. 59세ㆍ63세ㆍ64세 때 병을 심하게 앓은 뒤 65세 때는 정종에게 왕좌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내려간다. 74세에 풍을 ‘맞은’ 뒤 넉 달 만에 숨진다.
 풍(風)은 피부병ㆍ당뇨병(소갈증)과 함께 조선의 왕을 괴롭힌 대표적인 가계 질환이다.
 요즘은 풍이 중풍(中風, 뇌졸중)을 가리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풍ㆍ관절염ㆍ감기를 두루 풍이라고 기술했다. 풍을 맞은 왕이 여럿인 것을 근거로 “조선 왕들은 당뇨병 가계력(家系歷)이 있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 학자도 있다. 안질(眼疾) 등 여러 질병을 끼고 살았던 세종도 당뇨병 환자였다. 종기ㆍ부스럼 등 피부병에 걸린 왕도 많았다. 문종ㆍ효종은 피부병으로 숨졌다.
 태조의 아들인 정종은 ‘골프’를 치는 것으로 건강을 돌봤다. 요즘 골프와 비슷한 격구란 경기를 즐겼다. 조정에선 거의 매일 격구를 하는 왕에게 자제를 청했지만 “과인이 병이 있어 수족이 아프고 저리다. 몸을 움직이고 기운을 통하게 하기 위해 격구를 한다”(정종실록)며 이를 물리쳤다. 궁궐생활이 체질에 잘 맞지 않았던 정종는 왕위에 오른지 2년2개월 만에 동생 태종에게 양위하고 그 뒤 약 20년을 더 산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찾은 마음의 안정과 숨지기 2년 전까지 즐긴 격구가 그의 장수 비결이었다.
 격구는 땅에 구멍을 파고 달걀만한 공을 집어넣는 운동이었다. 폴로(polo)처럼 말을 탄 채로 공을 치는 기마(騎馬) 격구도 있었다. 격구 채는 골프채와 비슷하나 크기는 훨씬 작았는데 두꺼운 대나무와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다.
 격구 마니아였던 정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 왕은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매 사냥ㆍ활쏘기ㆍ온천 나들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 걸음의 거리도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세수도 스스로 하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는 배를 문지르면서 궁 내를 산책하는 정도였다.
 광해군은 왕실에서 과보호를 받고 자란 군주가 아니다. 세자 시절엔 임진왜란을 맞아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허준이란 당대의 명의를 만난 것도 그에겐 행운이었다. 그는 어의(御醫)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허준이 “침을 연거푸 맞으면 안 된다”고 진언하면 그대로 따랐다. 부왕인 선조가 숨진 뒤 “치료를 담당했던 어의 허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신하의 주청에 못 이겨 허준을 귀양 보내지만 나중에 다시 불러 들여 자신의 건강을 돌보게 한다(광해군 일기).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광해군과는 달리 어의의 조언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때때로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가 37세에 숨지자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장희빈의 연인이었던 숙종은 타고 난 건강체질의 소유자였다. 야사에는 “그들(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이 불과 같아서 한 겨울 밤에도 열기를 식혀줄 부채가 필요했다”고 전한다.
 숙종은 신하로부터 ‘여색을 멀리 하라’는 충언까지 들었다. 그가 어릴 때 두창(천연두)이 유행해 왕실에서도 희생자가 적지 않았다. 숙종은 천연두를 심하게 앓고도 소생했다. 종기ㆍ임병 등 여러 질병을 앓았지만 강한 면역력이 그를 지켜 주었다.
 숙종이 건강을 위해 챙겨 먹었던 음식은 검은콩ㆍ검은깨ㆍ오골계ㆍ흑염소 등 주로 검은 식품이다. 특히 건강한 오골계를 골라 그 속을 비운 뒤 흑염소 고기ㆍ검정콩ㆍ검은깨를 넣고 2시간 쯤 푹 고아 고기와 국물까지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행(五行)과 한방에선 검은 색이 신(腎)의 기운을 높여준다고 본다. 한방에서 신의 기운이란 생식기를 포함해 생체 에너지를 뜻한다. 신의 기운이 약해지면 스태미나가 약해지고 노화가 시작된다.
 흑염소 수컷은 한마리가 100마리의 암컷과 관계를 맺는다는 속설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성기능 강화에 사용됐다. 흑염소 뼈를 넣어 만든 앙골죽이 남성의 성기와 근골을 강화시킨다는 속설이 나온 것은 이래서다.
 적게 먹으면 오래 산다는 것은 원숭이와 쥐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 이미 증명됐다. 이를 실천한 왕이 영조이다. 그는 조선의 왕 가운데 최장수 왕(1694∼1776년)이다. 조선 왕의 평균 수명(46세)보다 거의 두 배나 더 살았다.
 요순시대의 재현을 목표로 탕평책을 폈던 영조는 스스로도 절제와 검약을 실천했다. 하루 다섯 번 올렸던 수라를 세 번으로 줄였다. 대신과의 어전 회의 도중에도 식사 때가 되면 수라를 받을 만큼 식사가 규칙적이었다. 가뭄ㆍ홍수가 들면 반찬의 가짓수도 줄였고 거처도 허름한 곳으로 옮겼다. 주색도 멀리 했다. 밥도 흰쌀밥보다 잡곡밥을 선호했다.
 과식을 경계한 영조가 즐긴 음식은 미음에 우유를 섞어 끓인 타락죽(駝酪粥)이었다. 이탈리아 음식 리소토와 비슷한 타락죽은 소화가 잘 되고 단백질ㆍ지방을 보충해주는 조선 왕실의 보양식이었다. 소화력이 약하고 입이 짧았던 영조는 차고 설익은 음식을 싫어했다. 사도세자가 13살 때 냉면과 청도(靑桃, 덜 익은 복숭아)를 먹고 배탈이 나자 영조는 “아주 해로운 것을 먹었다”며 나무랐다. 영조가 그나마 즐겨 든 생선은 조기였다. 그는 여름이면 보리밥을 물에 말아 조기를 반찬 삼아 먹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숙빈 최 씨로부터 건강한 유전자도 물려받았다. 한동안 궁 밖에서 생활했던 것도 그의 장수를 도왔다.
 그는 당쟁을 뿌리 뽑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탕평채는 당쟁 타파를 논하는 자리에 처음 올랐던 음식이다. 삼짇날의 절식(節食)인 탕평채는 녹두묵에 고기볶음ㆍ미나리ㆍ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이다. 영조는 영양적으로 균형을 잘 이룬 음식을 먹은 셈이다.
 이런 영조도 말년에는 기력과 분별력이 떨어져 정치적 실수가 잦아진다. 아들인 사도세자를 의심해 죽인 것이 한 예이다. 사가(史家)들은 그가 노인성 치매를 앓은 것으로 추정한다.
 요즘 영양학자가 조선 왕의 식습관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가장 후한 평가는 고종이 받았을 것이다.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멀리 한데다 육식보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고 식혜를 즐겨 마셨다. 겨울철 야식으로 온면ㆍ냉면ㆍ설렁탕을 즐겼는데 이때도 맵고 짠 양념은 들어가지 않았다. 국물도 육수 국물 대신 동치미 국물을 사용했다.
 수라 위에 팥밥과 쌀밥을 동시에 올려놓고 소화가 안 되거나 속이 안 좋을 때는 팥밥과 미역국을 먹었다.
 고종이 열강의 압력 등 극심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장수한 것은 양방과 한방의 혜택을 동시에 누린 첫 번째 왕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병준 기자 chlqudwns@foodnm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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