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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창/김애양]마약 중독자라고 스스로 커밍아웃한 영국 소설가①
[전문가의 창/김애양]마약 중독자라고 스스로 커밍아웃한 영국 소설가①
  • 푸드앤메드
  • 승인 2017.09.0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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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드 퀸시의 모습 - 존 왓슨 고르돈이 그린 인물화

토마스 드 퀸시 ‘어느 영국인 아편중독자의 고백’ ①


한번은 경찰관이 우리 병원을 찾아왔다. 젊고 호리호리한 아가씨와 동행이었다. 경찰관은 마약 용의자인 그 아가씨의 소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마약 복용의 혐의가 있어 소변검사를 해야 하는데 용의자가 젊은 여성이다 보니 인권보호차원에서 산부인과에 의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 간호사의 입회하에 소변을 보았고 그렇게 채취한 소변을 경찰에 넘겨주었다. 사실 경찰 뿐 아니라 간혹 검찰이나 군대에서 요청하는 이런 종류의 협조가 썩 기꺼운 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을 보고 우리나라에선 마약관리가 철저히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상대방을 간파하기란 쉽지가 않다. 제 아무리 용한 의사라 해도 진찰실에 마주앉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마약 중독자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퀸시의 고백이 의미 있는 이유

마약중독자라고 하면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 시절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완전 폐인이 돼 몸을 벌벌 떨면서 구걸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중독자 가운데는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므로 쉽게 감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비단 마약뿐이랴? 알코올 중독자도 카페인 중독자도 수면제나 판피린 중독자도 평상시엔 타인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중독 상태를 감출 수 있음이 인체의 특징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가 중독자임을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남다른 시선으로 주목해야 한다. 그런 작가가 영국의 토마스 드 퀸시다. 1785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약 2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이름에 ‘드’(de)가 붙은 것으로 그가 귀족가문 태생임을 알 수 있다. 귀족이면 어떻고, 노예면 어떠랴. 더 중요한 건 아편에 중독됐던 그가 이 중독의 문제점을 상세히 밝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편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최초의 작가란 점이다. 당시는 아편의 중독성도 모른 채 많은 계층의 사람이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쉽게 아편을 복용했고 그 결과 쉽게 중독이 됐던 시절이었다. 그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자.

아편 복용 후 1시간이 지나자 찾아온 격변

1804년, 퀸시가 대학생이 된 19세 때 처음 아편을 복용하게 된 계기는 치통에서 연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날마다 머리를 감는 습관을 가졌다. 하루는 치통이 심해 머리를 감지 않게 되자 스스로 나태해졌다는 생각에 자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찬물에 머리를 담근 후에 말리지 않은 채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치아뿐 아니라 얼굴과 머리 전체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됐다. 퀸시의 이런 증상은 오늘날 진단 내리자면 안면신경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쉼 없는 통증을 20일간 겪었다. 21일이 되는 날 통증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으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우연히 한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아편을 소개했다. 퀸시도 아편이 암부로사라고 부르는 ‘신의 음식’이란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약인 줄은 몰랐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비 내리는 옥스퍼드가(街)를 지나며 한 약국에 들렀다. 일요일에 근무 중인 약사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아편을 건넸다. 퀸시가 1실링을 내자 반 페니 동전을 거슬러주며 알코올에 녹인 아편팅크를 준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편을 복용한지 한 시간이 지나자 퀸시에게 최고의 격변이 일어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내부의 영혼이 위로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부 세상이 드러났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고통은 내 앞에 열린 무한한 긍정적인 결과에 완전히 가라앉아 사라졌다. 심연에 자리 잡은 신성하고 무한한 기쁨의 세계가 갑자기 드러났다. 아편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철학자가 수 세기 동안 토론을 벌여왔던 행복의 비밀이 아편에 있었다. 이제 그 행복을 1페니로 사서 호주머니 안에 넣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시인의 딸이 죽자 다시 아편에 빠져

퀸시는 아편을 칭송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복용하진 않았다. 간헐적으로, 예를 들어 졸업시험을 치르며 불안감을 느낄 때 몇 방울의 아편을 마셨다. 그로부터 8년 후 다시 아편에 의존할 만한 고통을 겪게 됐다. 이때는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감정의 고통이 포함됐다. 지극히 사랑했던 한 꼬마의 사망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익히 알려진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의 딸 케이트다. 당시 영국에서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워드워즈를 찾아간 퀸시는 그 집안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는 동안 케이트를 각별히 사랑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죽자 슬픔을 감내하기 힘들었다. 이때 끔찍한 위통이 시작됐고 이를 계기로 퀸시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편중독자가 됐다. 그는 너무나 쉽게 아편의 매력에 굴복했다. 17년간 중독자의 삶을 보냈다. 훗날 각고의 노력으로 그 중독에서 벗어난 시기도 있기에 고백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케이트의 죽음이 퀸시에게 예사롭지 않은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1785년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퀸시는 직물상 집안의 8 남매 중 4째였다. 당시 맨체스터는 면직물 제조의 중심지로서 이 산업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상류층에 가까운 퀸시 집안은 안락하고도 부유했으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퀸시가 8세일 때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나 형은 재산을 돌볼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퀸시는 재능이 많고 언어에 소질이 많으며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아이였다. 몸은 그다지 튼튼한 편이 아니었다. 16살 때 어머니와 후견인의 못마땅한 참견에서 해방되기 위해 무단가출을 했다. 다니던 학교에서 도망쳐 나와 웨일즈에서부터 걸어서 런던까지 가면서 죽을 정도의 굶주림을 겪었다. 그 결과 위장을 상하게 만들어 훗날 위통을 달래기 위해 아편에 의존해야 써야 하는 사연이 생긴 것이다. 퀸시는 이 시절 런던에서 거리의 여인 ‘앤’을 만났다. 그녀는 퀸시가 배고픔으로 쓰러져 계단에서 구르자 자신의 지갑을 털어 포도주 한 잔과 과자 몇 조각을 사다 줬다. 퀸시보다 나이가 어린 앤은 사창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냈다. 얼마 후 퀸시가 후견인과 합의가 돼 돈을 받으러 가면서 앤과 잠시 헤어지게 된다. 당연히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돌아온 뒤 앤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를 앤으로만 알고 있을 뿐 성(性)을 제대로 알아두지 않은 과오를 두고두고 후회한다. 훗날 퀸시의 문학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원형은 이 앤처럼 버림받은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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