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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창/한정호] 검증 안 된 약과 의학지식,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전문가의 창/한정호] 검증 안 된 약과 의학지식,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 푸드앤메드
  • 승인 2016.08.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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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미국에서 수백만부의 판매를 올린 <‘그들’이 당신에게 알게 싶게 하지 않은 자연치료법>이란 책의 저자는 ‘케빈 크루도’다. 그는 책과 인터넷을 통해 “에이즈는 실존하지 않는 병이며 의사와 제약회사가 돈을 벌려고 만든 허구의 질환이다. 항암치료를 하느니 암을 그냥 두는 게 더 낫다. 세균이 감염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생체에너지(기 등)의 불균형으로 병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후 미국 정부는 잘못된 의학지식으로 국민에게 주는 피해를 막기 위해 그를 고발했다. 그는 2011년 410억원의 벌금을 선고받고 더 이상 이런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게 됐다. 수많은 사망 환자 유족과 피해환자가 직접 나서서 고발해도 해결이 힘든 ‘대한민국의 옥시사태’와는 너무도 비교된다.

국내에도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유사한 주장을 해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2012년 의학 분야 베스트셀러가 된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의 작가인 H씨다. 책을 통해 “병원에 가면 안 되며, 에이즈와 암은 돈을 벌려고 제약회사와 의사가 만든 허구의 질병이며, 백신도 효과가 없다. 설사 암이 있다고 해도 자연 생활을 하면 저절로 없어진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이는 언론에서도 여과 없이 보도됐다.

물론 지각 있는 네티즌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은 음모이며, 오히려 건강에 유익하다. 염화칼륨엔 나트륨이 98% 들어 있다. 세균으로 인해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등 중학생도 납득하기 힘든 비(非)과학적 주장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런 주장의 허구를 지적하는 학계와 언론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론ㆍ인터넷의 강자로 성장했다. 얼마 전 그는 폐결핵과 중증 당뇨병을 병원에서 진단 받았지만 치료를 거부하다 숨졌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 몇 가지를 짚고자 한다.

첫째, 폐결핵은 명백한 감염성 질환이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항생제 내성이 생기며, 내성이 생긴 결핵균에 감염되면 치료가 더욱 힘들어지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결핵은 잠복하고 있다가 복막이나 장ㆍ뇌로도 침범할 수 있어 국가가 관리하는 감염성 질환인데도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감염성 질환은 본인이 치료를 안 받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다.

둘째, H씨의 인터넷 카페에서 배운 대로 암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고 방치하다 숨진 환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제대로 검증 받지 않은 치료법을 권유하는 대체의학자가 자유로이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이 정도면 언론을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지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셋째, 어느 사회에나 전통이란 외피를 두른, 검증을 거부한 유사의학이 존재한다. 점성술ㆍ사이비 과학도 일정 부분 통용되고 있다. 미국ㆍ영국에선 많은 의사와 과학자가 이를 바로 잡고자 대중서를 사비(私費)로 제작하고, 각종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모니터하고 있다. 이는 학계와 국민으로부터 이들 집단이 존경과 신뢰를 받는 중요한 이유다. 한국의 전문가 집단인 과학자와 의사 중에 이런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잘못되거나 근거가 부족한 의학정보를 퍼뜨리는 사람’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보자. 미국 보건당국과 정부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잘못된 의학정보가 국민에게 끼칠 악영향을 경제 사기로 다룬다. 법원의 일관된 판결도 잘못된 지식을 파는 사람을 위축시킨다.

우리나라는 국민 건강을 걱정해 학교 앞 탄산음료ㆍ떡볶이를 비만음식으로 지정하고 퇴출하기 위한 법과 시행령까지 만든 나라다. 반면 인체에 바로 작용하는 화학약품과 약은 객관적 검증이 면제된 것이 수두룩하다. 이런 현실을 보면 정말 국민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국가라고 평가하긴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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